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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닭싸움

킹스골프 2025. 12. 21. 00:01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시절이지만 대학 안에서는 예비역이란 칭호와 함께 노땅으로 분류가 된다. 삶의 30년도 채워지지 않았는데 마치 인생 통달한 사람 대하듯 후배들은 우러러 본다. 대학이라는 울타리가 만들어낸 희극이다.
학기 초에는 항상 교내에 에너지가 넘쳐난다. 희망에 부풀어 이제 막 입학한 새내기들 덕분이다. 이들은 때로 좌절과 방황을 하기도 하고, 나름 목표를 세워 맹렬하게 정진하기도 한다. 이러한 젊음의 에너지가 마구 발산되어 교정은 활기를 띄게 된다.
MT를 가게 되었다. 우리 학번 노땅들은 4개로 짜여진 조에 골고루 분포가 되었다.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통적으로 해왔던 방식과 이미 경험한 바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하고 챙긴다. 같은 학교 같은 과에서 같이 학업을 쌓는 무리들이 교정이라는 틀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교류의 장을 갖는다는 것은 참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청량리역에 모여 인원 파악을 하고 목적지인 대성리로 향했다. 동기 중 한 명은 교수님 일행을 모시고 차로 따로 왔다. 학과장님의 MT 격려 말씀 순서가 끝나자 본격적인 일정이 진행되었다. 노땅들은 일선에서 물러난 채로 집행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모두 운동장에 모였다. MT에는 빠질 수 없는 조 대항 체육 행사가 열렸다. 무엇일까 궁금했다.
종목은 닭싸움. 조별로 5명씩 선발하여 최종으로 남는 인원의 조가 우승하는 방식이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 블로그의 탁구 에세이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어려서부터 몸에 익은 것은 자연스럽게 자세가 나오는 법이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서부터 태권도장을 다녔다. 거기서는 주말에 항상 두 팀으로 나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운동회를 했다. 그 중에서도 닭싸움은 주말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로 가장 마지막에 벌어졌으며 모두 치열하게 다리를 부딪혔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모여 딱히 할 게 없으면 닭싸움을 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단련된 닭싸움은 그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후배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어본다. "선배님, 닭싸움 잘하세요?" 나는 답했다. "열심히 해보지 뭐." 아닌게 아니라 우리 조 선발 인원들은 모두 운동과는 거리가 먼 허약 체질인 듯 보였다. 낯설은 예비역 노땅마저 자신없게 답을 하자 거의 망했다는 표정이다.

큰 원이 그려지고 선수들이 입장하였다. 준비 구령에 자세를 잡고 이어 곧 시작 휘슬이 울렸다. 우리 조는 황색이다. 우르르 몰려 나가 난타전이 벌어진다. 나는 일단 2선에서 전력을 탐색했다. 역시나 아이들의 실력은 그저 그랬다. 그런데 후배가 우려했던대로 우리 조 선수들이 초반에 추풍낙엽처럼 다 떨어져 나갔다. 우리 조 응원쪽에서 탄식과 나를 향한 화이팅 함성이 들려온다. 그 때 한 녀석이 호기롭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거리를 재고 있었다. 녀석이 방심하며 내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나는 왼발을 튕겨 떠올라 한 방에 녀석을 침몰시켰다. 와~~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 옆에서 공격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시야에 포착됐다. 몸을 비틀어 스피닝 카운터를 작렬하여 또 한 녀석이 넘어졌다. 이 때부터 남은 선수들이 나를 타겟으로 협공을 하기 시작했다. 둘이 나란히 붙어서 공격하면 공격력이 2배가 될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나는 고마웠다. 1타 2피. 둘을 동시에 쓰러뜨리자 운동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뒤늦게 다크호스를 인식한 선수들은 서로 약속한 듯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포위가 되어도 걱정은 없었다. 자유자재, 종횡무진, 용감무쌍. 뒤에서 공격을 당해도 내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예비역 노땅의 고군분투는 우리 조 응원쪽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내가 성큼성큼 뛰어 다가가자 뒷걸음치다 넘어지는 녀석, 라인 근처에서 버티다 내 공격 파워에 아웃된 녀석. 다가오다 내가 휙 돌아서서 다가가면 움찔하며 후퇴한다. 이미 기세가 꺾였으므로 더할 것도 없어 보였다. 다 탈락하고 우승을 가릴 두 사람이 마주보았다. 그런데 내가 먼저 다가가자 체력이 다 소진된 듯 다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 기권을 해버린다. 나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우승을 알렸다. 환호성은 대단했다. 후배들한테는 기막힌 반전의 느낌이었나 보다.

저녁을 먹고 삼삼오오 모여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술잔을 기울여 가며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시간. 시행착오와 극복 그 모든 것이 미래에 값진 재산으로 매겨질 아름다운 시기.

어렴풋이 생각난 MT 이야기다.